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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부르는 목소리

잡학사전

by Leonard Park 2014. 7. 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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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를 부르는 목소리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를 읽고

 

 

가끔 나는 내가 원하는 것과 삶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 했는지를 깨닫는다.

이 책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걸어왔으며 가장 자신답게 사는 길을 찾아온 저자의 삶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우리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지에 귀 기울여야하며 우리가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며 소명의 참된 의미는 'vocation'이라는 단어 안에 숨겨져 있다.

소명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목소리 voice’이다.

소명은 내가 추구해야할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주는 내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일러 주는 진리와 가치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마지못해 따르는 삶의 기준이 아니라 진정한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준 말이다.

영혼은 소환장이나 반대 신문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하게 그를 받아들이며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우리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도록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또한 말로는 결코 건드릴

수조차 없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침묵이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 자아가 바로 진정한 소명의 씨앗이자 우리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다.

소명이란 성취해야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갓 태어난 아이는 이미 자기만의 형상을 선물 받았으며 자기만의 숭고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 머튼은 이것을 참자아라고 했고 퀘이커 공동체에서는 내면의 빛 또는 각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의 형상’이라고 부르며 인문주의자들은 정체성이나 본성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너무나도 고귀하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를 살면서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나머지 후반의 인생을 바쳐 원래 갖고 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소명에 대한 가장 깊은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더욱 본질적이며 어려운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 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아와 봉사를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다.

뷰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인간 자아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신이 창조한 선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퀘이커 공동체의 지도자인 더글러스 스티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대 인류의 의문은 불가피하게도 역시 중요한 문제인 ‘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귀결된다는 말을 즐겨했다.

자아와 봉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시인 루미의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제시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 끔찍한 해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와 봉사와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좀 더 고무적인 방법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

참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주는 그 어떤 보상도 자기 스스로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보상만은 못하다.

메이 사튼이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참자아를 향한 순례 여행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거쳐야 한다.

세상은 자신을 위해서 또 사회와 정치적 활동을 위해서 순례에 나설 열정과 인내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를 기다린다.

나의 진리, 당신의 진리, 우리의 진리.

그 진리는 우리 각자가 이 땅에 처음 올 때 씨 뿌려진 것이다.

그 진리를 잘 경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길이 닫힐 때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하라.

길이 열릴 때 당신의 재능을 믿고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하라.

우리 모두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말은 한계와 능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능력을 깨닫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자기 한계에 뛰어들어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한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는 자아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이나 정치적인 세력이 우리를 현재 상황에 눌러 앉히기 위해 무모하게 부과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신과 함께 산다.

본성이 아닌 것을 따르는 사람은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체는 신께 속한 것이니 거스르지 말고 그대로 존중하며 따를 일이다.

신은 단지 우리가 창조된 본성 즉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내가 아는 신은 도덕보다는 현실의 근원 즉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근원이다.

능력과 한계를 지닌 우리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우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다.

존 미들턴 머리는 이 진리를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선의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선한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완전해지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올바름이 화려한 면허증이었던데 비하면 험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신과 함께 산다.

본성이 아닌 것을 따르는 사람은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체는 신께 속한 것이니, 거스르지 말고 그대로 존중하며 따를 일이다.

루스가 가르쳐 준 대로 등 뒤에서 길이 닫히는 것에는 우리 앞에서 길이 열리는 것만큼이나 많은 교훈이 들어있다.

열림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고 닫힘은 우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것이 영적인 세계 속에서 정체성이라는 동전이 가진 양면인 것이다.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반대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성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사람을 향한 신의 사랑은 우리를 ‘고치는’게 아니라 함께 고통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독의 가장자리에서 존경과 믿음을 갖고 서 있음으로써 우리는 신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기를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방어하다가 서로를 접하고 인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겸손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낮아진 부식토에서 땅 위로 다시 자라나게 한다.

플로리다 스코트 맥스웰은 “자신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사건들을 주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동안의 자기 모습, 자기 행동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되면 당신은 현실에 치를 떨게 될 겁니다.”라고 말한다.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피이다.

당신 역시 이 땅에 살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혜의 전통들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내적 여행을 계속 하라, 에고를 지나쳐 참 자아에 이르라.

그러면 자아도 취해 빠져 헤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따르는 책임감을 좀 더 늠름하게 간직한 채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피일 수도 있다.

우리가 공동체라는 이름의 밀접하게 짜여진 생태계에 살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인도를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사람이 인도해야 한다.

당신의 의식과 나의 의식은 세상을 창조할 수도 해체할 수도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끔찍하고 때로는 괴로운 책임의 근원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절실한 희망의 근원지로 만드는 데 공모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이며 우리 모두를 리더로 만드는 진실이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리더는 세상의 어떤 부분에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그늘과 빛을 드리울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이다.

훌륭한 리더는 리더십의 행위가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내면의 그늘과 빛의 상호작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대중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외향적인 기질이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종종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더는 외부 세계를 경영하는 전문적인 기술일 뿐만 아니라 그늘과 빛의 근원을 향한 내면의 여행을 올바로 해내는 영적인 기술도 갖추어야 한다.

'영성‘이란 말은 리더십과 마찬가지로 정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애니 딜라드는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생한 이미지를 제시했다.

“우리 의식 깊은 곳에는 폭력과 테러라는 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괴물들을 타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의 테두리를 넘어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과학으로는 밝혀낼 수조차 없는 거대한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매트릭스 구조와도 같은 그 속에 세상 만물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 지점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선에게는 선한 힘을 악에게는 악한 힘을 주는 근원입니다.

이 지점은 매우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장입니다.

또한 이 지점에 다다르면 서로에 대한 그리고 또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애니 딜라드는 영적 여행의 중요한 특징 두 가지를 지적한다.

그 중의 하나가 어둠으로의 여행이다.

어둠의 여행은 우리를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향해 안으로 아래로 이끌고 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적이고 긍정적인 세계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행이다.

어둠의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어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드리우는 그늘의 궁극적인 근원이기도 하다.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억압하는 리더가 되고 만다.

어둠의 여행을 통해 계속 내려가면 중요한 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지점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장이며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또한 조각난 인간 삶의 표면 아래 공유되는 의식의 공동체이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 내부의 어둠을 뚫고 지나가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지점에까지 도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미 어둠을 경험했고 길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완전함’으로 이끌 수 있다.

넬슨 만델라나 바클리프 하벨 그리고 아래로 향한 길을 여행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어둠의 세계를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근원적인 사랑으로 이끌고 갈 능력을 가지고 말이다.

왜 사람들은 위압적이고 험난한 안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느냐고?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안으로, 아래로 향하는 영적 여행길의 과정 속에 있다.

훌륭한 과학자는 가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진리에 이르는 데 필요한 길을 더 선명하게 알려준다.

정체성이란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이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정체성은 우리가 신의 자녀라는 간단한 사실에 달려 있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는 혼돈이 창조성의 전조라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모든 창조 신화에 있듯이 인생도 무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창조된 것도 때때로 혼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욱 생기 있는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내적 여행에서 우리가 얻는 선물은 결국 모든 것에는 죽음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다.

생명이 다한 어떤 것을 죽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계절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의 법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 알의 씨앗은 끝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삶의 단계를 진행시킨다.

계절의 순환은 우리에게 그 여행에 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 인생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신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와 같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주위를 나선형으로 돌면서 따라 내려간다.

하지만 시인 릴케는 우리 삶 전체가 ‘질문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도 그때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보인다.

실직이 내게 필요한 일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음을 ‘길 막혔음’이라는 표지 덕분에 내가 방향을 돌려가야 할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회복 불능이라고 느꼈던 손실 덕분에 내가 진짜 알아야 할 의미를 깨닫게 되었음을.

표면상으로는 인생이 작아지는 듯 보였지만 언제나 소리 없이 그리고 풍부하게 새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죽음과 우아함이 손을 맞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을 토마스 머튼의 “보이는 모든 것에 온전함이 숨어 있다”는 말에서 구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에서 위대한 진실은 흔히 볼 수 있는 곳에 숨어 있다.

쇠락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 죽음과 삶은 상반되는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숨겨진 온전함’의 역설 속에 함께 존재한다.

역설 속에 상반되는 둘은 각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둘은 현실의 심장부에서 신비스러운 결합체로 하나로 된다.

나아가 그 둘은 같이 있어야 건강하다. 우리 몸에 들숨과 날숨이 모두 있어야 하듯 말이다.

가을은 새 생명의 전조로서 매일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겨울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겨울잠과 깊은 휴식이 꼭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봄을 준비하기 위해 땅 밑으로 내려갔다.

겨울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훈계를 주는 계절이며 심지어 우리 스스로 그런 훈계를 할 마음이 들게 하는 계절이다.

북쪽 중서부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게 다름과 같은 충고를 해준다.

“이곳에서는 겨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겨울 때문에 미쳐버릴 겁니다”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두려움 속으로 대담하게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 두려움이 우리 인생을 지배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똑바로 걸어 들어가면 우정이나 내적 훈련 또는 영적 인도라는 따뜻한 보호 장구를 껴입고 동상에 걸리지 않은 채 그들이 전해 주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계절의 순환이 믿을 만한 것이며 생명을 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식물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하는 썩은 야채 등의 부산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식토'라는 단어의 어원은 ’겸손'의 어원과 같다.

인생은 언제나 겨울이 강요하는 바대로 자로 재듯 측정하며 사는 게 아니라 가끔은 다채로운 색채와 성장에 탐닉해 흥청망청하게 될 때도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가을의 풍족한 씨 뿌리기에서부터 엄청난 봄의 선물공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한결같은 교훈을 일러준다.

즉 우리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그것을 움켜쥐고 있지 말고 아낌없이 써 버리라는 것이다.

지나친 손익 계산과 생산성, 시간과 활동의 능률성, 수단과 목적의 합리적인 관계, 적당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이르는 ‘최단코스'를 만들어 내는 것에 집착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결실을 맺기도 힘들고 우리 인생에서 봄의 충만함을 누리기란 힘들 것이다.

자연은 대개 궁핍의 시기에도 언젠가 풍요로운 들판이 돌아올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궁핍과 풍요가 순환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정말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은 삶에 대해 느껴 왔던 것들을 담담히 옮긴 책이지만

영혼, 자아, 소명 그리고 책임의식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 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저자처럼 깊은 고민과 사색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어렴풋이나마 삶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목소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쫓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해답은 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며

나답게 사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내 마음을 가장 감동시킨 한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뒤쪽에 있는 문에 다다른다.

그러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지금 열리지 않는 문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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